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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에 묻노라. 上 비가 온다. 비님이 온 누리를 큰 가슴으로 품는다. 푸름이 흠뻑 물을 들이켜 수액(樹液) 오르는 소리가 심장(心臟) 고동(鼓動) 소리보다 더 크게 마음을 희망(希望)지게 한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고 어느 시인(詩人)은 찬란(燦爛)하여서 서러운 시상(詩想)을 마음껏 노래하였다. ‘서러운 풀빛’은 어떤 색감(色感)일까? 봄비에 놀란 연두 빛깔이 심상(心象) 저 밑바닥을 서럽게 요동(搖動)치게 하는 것일까? 역시 시인(詩人)의 육성(肉聲)은 세상(世上)을 한 번 더 굴절(屈折)하여, 자신(自身)의 내공에서 오래도록 묵히고 묵혀 힘껏 내뱉는 고통(苦痛)의 소리인가 보다.
김부식 영정
www.pjnonsul.com 우리는『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우리 고대사(古代史)를 기록(記錄)한 귀중(貴重)한 문화재(文化財)를 보물(寶物)로 알고 있다. 사실이다. 기전체(紀傳體)로 편찬(編纂)된 이 책(冊)은 김부식(金富軾 : 1075~1151)과 정습명(鄭襲明 : ?~1151) 등 9명이 官撰(관찬) 正史(정사)를 표방(標榜)하면서 고려(高麗) 인종(仁宗) 23년(1145)에 50권으로 간행(刊行)되었다. 그동안 사대주의(事大主義) 역사관(歷史觀)을 가졌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批判)을 받았다. 일정 부분(部分) 옳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분(一部分)에 사대(事大)의 흔적(痕迹)이 나타난다고 해서 전체(全體)를 오도(誤導)하는 우(愚)를 범(犯)하면 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김유신 저택의 ‘재매정’
www.pjnonsul.com 먼저 비판(批判)받는 부분(部分)을 대별(大別)해보면,
www.pjnonsul.com 첫째, 가야(伽倻)를 제외(除外)시키고 삼국(三國)만 다루어서 우리 역사(歷史)를 축소(縮小)한 것이라고 문제(問題) 삼는다. 그러나 전체(全體)를 읽어보면 가야(伽倻)의 왕(王)이 5명(名)이나 기록(記錄)되어 있다.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수로왕(首露王)-뇌질청예(惱窒靑裔)-과 구형왕(仇衡王), 그리고 대가야(大伽倻)의 도설지왕(道設智王), 가실왕(嘉實王),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뇌질주일(惱窒朱日)-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혼인(婚姻), 전쟁(戰爭) 등 곳곳에 가야(伽倻)의 흔적(痕迹)을 기록(記錄)하고 있다. 또한 신라(新羅)의 사국(四國) 통일(統一) 후(後) 북국(北國)이라고 표현(表現)한 발해(渤海)와도 선린외교(善隣外交) 기사(記事)가 보인다. 책(冊) 이름에서 선입감(先入感)을 가지고 보니까 그런 것 같다.
www.pjnonsul.com 둘째, 북위(北魏)로부터 수(隋), 당(唐)나라에 일 년(年)에도 여러 차례 조공(朝貢) 사절단(使節團)을 파견(派遣)했다는 것을 보면 사대주의(事大主義) 역사관(歷史觀)으로 집필(執筆)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국(大國)과 육지(陸地)로 연결(連結)된 나라치고 살아남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사절단(使節團)을 파견(派遣)하지 않은 나라가 이 지구상(地球上)에 있는가. 그리고 사대(事大)라고 주장(主張)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약(弱)한 나라가 강(强)한 나라와의 선린(善隣)에 중점(重點)을 두지 않고 1만년(萬年)의 역사(歷史)를 영위(營爲)할 수 있을까. 강(强)하게 되받아쳐 나라가 없어지면 그때 역사(歷史)니 민족(民族)이니 말 할 수가 있을까. 사실 중국(中國)은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少數民族)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다민족(多民族) 국가(國家)이다. 역사상(歷史上) 수많은 민족(民族)들이 결국(結局)은 한족(漢族)에 동화(同化)되어 그 흔적(痕迹)도 없이 사라지곤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보고 있다. 물론 중국(中國)에 사대(事大)하면서 살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現在) 동맹(同盟)이니 우방(友邦)이니 하면서 대국(大國)의 틈바구니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사대(事大)라는 놈에게 정말 자유(自由)로운 것인가. 대릉원 입구. 이곳에 수많은 신라의 왕들이 잠들어 있다.
www.pjnonsul.com 셋째, 왕(王)의 죽음을 천자(天子)의 죽음인 ‘붕(崩)’으로 표현(表現)하지 못하고 제후격(諸侯格)인 ‘훙(薨)’으로 적은 것을 問題 삼는다. 그러나 高句麗 本紀를 보면, 始祖 주몽(朱蒙)-동명성왕(東明聖王)-은 ‘승하(升遐)’라고 표현(表現)되어 있다. ‘승하(升遐)’는 ‘붕(崩)’과 같은 격(格)으로 알려져 있다.
www.pjnonsul.com 이렇게 장황(張皇)하게『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찬(編纂) 성격(性格)과 비판(批判)을 살펴보는 이유(理由)는 사실은 다른 데 있다. 사국(四國)을 삼국(三國)이라는 부분(部分)과 사대주의(事大主義) 역사관(歷史觀) 등은 비판(批判)하면서 정작 묻고 싶은 곳은 그냥 지나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고, 화랑(花郞)과 향가(鄕歌)에 관(貫)한 부분(部分)이다. 김부식(金富軾)은 화랑(花郞)이라는 제도(制度)를 분명(分明)히 알고 있었다.『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인용(引用)하면서 ‘현좌(賢佐)와 충신(忠臣)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보면 겨우 그 출신(出身)을 알정도(程度)의 지식(知識)밖에 제공(提供)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향가(鄕歌)는 그 곡명(曲名)만 여러 개 기록(記錄)하였지 단 한곡도 노랫말이 기록(記錄)된 것이 없다. 물론 유가(儒家)들은 ‘괴력난신(怪力亂神) 사리부재(詞俚不載)’를 원칙(原則)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화랑(花郞)과 향가(鄕歌)에 인색(吝嗇)한 이유(理由)가 이것이란 말인가. 왜 화랑(花郞)과 향가(鄕歌)가 괴력난신(怪力亂神)-괴이한 폭력이나 어지러운 잡귀신-이란 말인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理解)하여야 할까. 함께 하나씩 풀어 가보도록 하자.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흥덕왕릉
www.pjnonsul.com 김부식(金富軾)은 신라(新羅) 황족(皇族) 후예(後裔)이다. 그의 가계(家系)를 보면, 그는 무열왕계(武烈王系)의 후손(後孫)으로 이해(理解)되고 있다. 신라(新羅) 56대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고려(高麗)에 바치자,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를 경주(慶州)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任命)하였다. 이때 김부식(金富軾)의 증조부(曾祖父)인 김위영(金魏英)이 경주(慶州) 주장(州長)이라는 향리직(鄕吏職)의 우두머리에 임용(任用)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역시 경주(慶州) 향리직(鄕吏職)에 종사(從事)하다가, 아버지 김근(金覲)부터 중앙정계(中央政界)로 진출(進出)하였다. 그의 아버지 김근(金覲)은 예부시랑(禮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5품-에 올랐고,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돌아왔으나, 장년(壯年)에 죽었기 때문에 고관(高官)에 오르지는 못했다고 한다.
www.pjnonsul.com 특이한 것은 김부식(金富軾) 형제(兄弟) 4명이 모두 과거(科擧)를 거쳐 고관(高官)이 되었다는 것이다. 맏형 부필(富弼)은 선종(宣宗) 5년(1088)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였고, 둘째 부일(富佾 : 1071~1132), 동생 부철(富轍 : ?~1136)-후에 부의(富儀)로 개명(改名)- 역시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였다. 고려(高麗)에서는 국법(國法)으로 아들 3형제(兄弟)를 과거(科擧)에 합격(合格)시킨 어머니에게는 매년(每年) 30석의 곡식(穀食)을 내려주는 제도(制度)가 있었다. 김부식(金富軾)의 어머니는 4형제(兄弟)를 급제(及第)시킨 것으로 국왕(國王)이 매년(每年) 40석의 곡식(穀食)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더불어 예종(睿宗)은 세 아들을 한림(翰林)으로 두었다고 하여 특별(特別) 포상(褒賞)을 하려고 했으나, 김부식(金富軾)의 어머니는 이미 받은 포상(褒賞)도 지나친 것이라고 간곡(懇曲)하게 사양(辭讓)하였다고 한다. 그 자식(子息)의 그 어머니인 것이다.
흥덕왕릉 무인석
www.pjnonsul.com 이런 가문(家門)에서 자란 김부식(金富軾)은 황족(皇族)의 후손(後孫)이라는 커다란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라벌(徐羅伐)에 대한 특별(特別)한 애정(愛情)을 또한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金富軾)은 천년(千年) 황도(皇都) 서라벌(徐羅伐)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으면서, 왜 그 정신적(精神的) 지주(支柱)였던 화랑(花郞)과 향가(鄕歌)를 밝혀 적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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