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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도 부산의 문학 향기 , 향가 <정과정곡(鄭瓜亭曲)>


인문학(人文學)위기(危機)’란 이야기가 가을 벽두부터 육중(肉重)하게 우리 귓전을 뒤흔들어 놓는다.
아직 단풍(丹楓)이 예까지 찾아오려면 달포나 남았건만, 마음은 벌써 스산한 낙엽(落葉)이 한가득 쌓인 것 같이, 왠지 모를 다가오는 수심(愁心)에 가을이게 하는 코스모스를 반겨줄 겨를이 없어져 버렸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수영강 어귀에 한 무리의 아파트 빌딩 숲이 마천루(摩天樓)를 이루고 있다.
숨이 막힐 듯 굉음(轟音)도시고속도로(都市高速道路)와 아파트 진입로(進入路)정과정(鄭瓜亭)삼각형(三角形)으로 가로막아, 도심(都心) 속 외로운 섬으로 만들어 놓았다.
정서(鄭敍 : ?~?)의 외로운 유배(流配)살이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이끼낀 고목에서 정서의 외로운 유배 살이를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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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고려(高麗) 18대 의종(毅宗 : 1146~1170) 5년(1151년)이었다.
의종(毅宗)모후(母后) 공예태후(恭睿太后)<우리 역사(歷史)적자(嫡子) 셋(첫째아들이 고려 18대 의종, 셋째아들이 19대 명종, 다섯째아들이 20대 신종)이 왕위(王位)등극(登極)하는 것은 공예태후(恭睿太后)유일(唯一)하다>는 첫째 의종(毅宗)보다는 둘째 대녕후(大寧侯) ()을 매우 사랑하여, 그를 왕위(王位)옹립(擁立)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여동생과 결혼(結婚)정서(鄭敍)태후(太后)의 생각을 짐작(斟酌)하고 대녕후(大寧侯) ()지지(支持)하였다.
그러나 17대 인종(仁宗 : 1109~1146)과 폐신(嬖臣) 정습명(鄭襲明 : ?~1151(-『삼국사기)편찬시(編纂時) 편사관(編史官)으로 참여(參與)- 등의 반대(反對)실패(失敗)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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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종(毅宗) 5년 정서(鄭敍)는 처조카 대녕후(大寧侯) ()에게 술자리 주연(酒宴)을 베풀면서, 왕위(王位)에 오르지 못한 ()을 풀어주려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환관(宦官) 정함(鄭諴 : ?~?)에게 발각(發覺)되어, 정서(鄭敍)대녕후(大寧侯) ()추대(推戴)하려는 모반(謀叛)()를 뒤집어쓰고 동래(東萊) 남촌(南村)-현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수영강 가로 귀양을 오게 된다.
귀양지로 출발(出發)할 때 의종(毅宗)사적(私的)으로 이모부(姨母父)정서(鄭敍)에게 “대간(臺諫)탄핵(彈劾)으로 유배(流配) 보내니 곧 소환(召還) 하겠다.” 고 약속(約束)하였다.


정과정터에 온갖 건축자재가 나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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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東萊) 유배지(流配地)도착(到着)정서(鄭敍)는 수영강가에 정과정(鄭瓜亭)을 짓고, 거문고를 뜯으면서 개경(開京)에서 소식(消息)이 올 날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每日) 아침 의관(衣冠)을 정갈히 하고 망산(望山)-현 망미동 주공아파트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에 올라 북쪽에 계실 임금님께 절을 올렸다.
자신(自身)의 억울함이 금방이라도 풀어지기를 기원(祈願)하면서 임금님께 잔을 올린 것이었다.
진달래가 한가득 강물에 투영되는 봄이 지나고, 초동(草童)들의 물장구 소리가 매미 소리와 함께 수영강을 가득 메우던 여름이 가고, 장산의 붉은 단풍(丹楓)정과정(鄭瓜亭)을 비추는 가을이 이미 무르익어 가고, 포구(浦口)엔 하나둘씩 작은 고깃배가 얼음위에 넘쳐나는 겨울이 지나길 수십 번, 아무리 학수고대(鶴首苦待)를 해도 개경(開京)에서는 함흥차사(咸興差使)였다. www.pjnonsul.com
   그럴수록 정서(鄭敍)는 더욱 의관(衣冠)정제(精製)하고 망산(望山)에 오르길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하루는 거문고를 끼고 정과정(鄭瓜亭)에 앉아서 자신(自身)의 슬픈 속내를 향가(鄕歌)에 의지하여 눈물로 읊고 있었다.
끼룩끼룩 날던 갈매기도 가든 길을 멈추고, 정과정(鄭瓜亭) 주변(周邊)을 조용히 배회(徘徊)하며 슬픈 정서(鄭敍)의 마음을 같이 어루만져 주려 하였다.


정과정터에 있는 ‘정과정곡’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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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서(鄭敍)는 4대 광종(光宗 : 949~975() 균여대사(均如大師)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4대 현종(玄宗)(1094~1095)대(代의 <향풍체가(鄕風體歌)>와 16대 예종(睿宗 : 1105~1122)의 <도이장가(悼二將歌)> 이후(以後) 거의 사라진 향가(鄕歌)이용(利用)하여 자신(自身)의 억울함을 노래한 것이다.
정서(鄭敍)는 아마도 향가(鄕歌)의 뛰어난 주술성(呪術性)을 잊지 아니하고 그 영험(靈驗)으로 유배(流配)가 풀어지길 노래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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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정과정곡(鄭瓜亭曲)-일명 삼진작(三眞勺)-을 노래하면 다음과 같다. www.pjnons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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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님(의종)을 그리워하여 울고 다니는 것은 www.pjnonsul.com
   저 산의 접동새(두견새)와 비슷합니다. www.pjnonsul.com
   나를 헐뜯어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며 허황되다는 것은 www.pjnonsul.com
   지는 달과 새벽 별은 아실 것입니다. www.pjnonsul.com
   넋이라도 임과 함께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www.pjnonsul.com
   우기시던 분이 누구셨습니까? www.pjnonsul.com
   잘못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www.pjnonsul.com
   뭇사람들의 참언(讒言 : 거짓으로 꾸며서 남을 헐뜯는 말)입니다. www.pjnonsul.com
   슬픕니다.
아으 www.pjnonsul.com
   임께서 저를 하마 잊으셨단 말입니까? www.pjnonsul.com
   마십시오, 임이여, 마음을 돌리셔서 다시 사랑하여 주십시오. <악학궤범(樂學軌範)> www.pjnons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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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를 마친 정서(鄭敍)는 북받쳐 오르는 설움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유배문학(流配文學)효시(嚆矢)로 알려진 <정과정곡(鄭瓜亭曲)>은 이후(以後) 조선시대(朝鮮時代) 송강(松江) 정철(鄭澈 : 1536~1593)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으로 이어져 유배문학(流配文學)원류(原流)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www.pjnonsul.com
   역사(歷史)는 아이러니컬한 구석을 자주 보여준다고 하지 않던가. 인간사(人間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만약 이때 정서(鄭敍)가 귀양을 가지 않았다면 1170년 일어난 무신(武臣)()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을까? 문신(文臣)이라면 하급(下級) 말단직(末端職)까지 무참(無慘)참살(慘殺)무인(武人)들이 의종(毅宗)이모부(姨母父)정서(鄭敍)를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었을 것이란 쉽게 斟酌이 가고도 남는다.


정과정터에 버려진 정화조. 이것이 정과정에 있을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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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武臣)()으로 의종(毅宗)의 둘째 동생인 명종(明宗 : 1170~1197)이 ()으로 옹립(擁立)되자, 정서(鄭敍)는 마침내 20년 귀양에서 풀려나 개경(開京)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미 유배지(流配地)에서 척박(瘠薄)한 삶으로 노쇠(老衰)해질 대로 노쇠(老衰)정서(鄭敍)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고려(高麗) 17대 인종(仁宗)동서(同壻)로 또한 동래정씨(東萊鄭氏) 안일호장(安逸戶長) 지원(之遠)의 5세손(世孫)정서(鄭敍)조부(祖父) 정목(鄭穆 : 1040~1106)이 3품의 관직(官職)에 올랐고, 부친(父親) 역시 종2품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까지 이르렀던 고려조(高麗朝) 명문거족(名門巨族)일원(一員)이었다.
비록 문음(門蔭)-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부나 부친의 관직이 3품 이상이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으로 관직(官職)등용(登用)되었지만 벼슬이 정5품인 내시낭중(內侍郎中)에 이르렀던 고관(高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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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文學)이란 항상 인생(人生)참담(慘憺)함을 겪고 난 후 무르익는 것이란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말해준다.
20년 유배(流配)에서 더 비울 마음이 남아 있지 않은 정서(鄭敍)가 <정과정곡(鄭瓜亭曲)>이란 주옥(珠玉)같은 향가계열(鄕歌系列) 고려가요(高麗歌謠)-쇠잔기(衰殘期) 향가(鄕歌)로 보기도 한다-를 우리에게 남겨 놓은 것을 보면, 어쩌면 자신의 억울함을 직소(直訴)하기보다는 문학(文學)이란 외피(外皮)를 입고, 더욱 승화(昇華)미의식(美意識)절제(切除)와 더불어 나타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妥當)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과정터에 새롭게 건립된 ‘정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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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정과정(鄭瓜亭)엔 이젠 그 옛날 정서(鄭敍)가 시름을 달랬던 흔적(痕迹)이 아파트 진입로(進入路) 공사(工事)로 반 토막이 나있다.
800여 년 전 문학(文學)산실(産室)이었던 역사(歷史)현장(現場)을 아무런 계획(計劃) 없는 도시계획(?)에 의해 잘려나간 모습을 보면 탄식(歎息)을 넘어 한심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관광객(觀光客)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다는 위정자(爲政者)들의 말이 사실과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1년 전에 시작(始作)정과정(鄭瓜亭) 복원공사(復元工事)가 아직 건축(建築) 자재(資材)만이 휑하니 나뒹굴고, 앞의 마천루(摩天樓) 아파트는 위용(威容)을 자랑하듯 정과정(鄭瓜亭)포위(包圍)하고 있다.
이제라도 더 이상의 훼손(毁損)을 막고 ‘정과정유적지(鄭瓜亭遺蹟址)’라는 작은 팻말이라도 세워 정서(鄭敍)의 안타까움을 만날 수 있는 공간(空間)으로 거듭 태어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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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한자
1.危機  2.肉重  3.丹楓  4.愁心  5.都心  6.高麗  7.登極  8.結婚  9.斟酌  10.支持  11.嬖臣  12.參與  13.反對  14.失敗  15.酒宴  16.宦官  17.發覺  18.謀叛  19.南村  20.私的  21.彈劾  22.召還  23.約束  24.到着  25.衣冠  26.自身  27.祈願  28.鶴首苦待  29.咸興差使  30.鄕歌  31.周邊  32.徘徊  33.嚆矢  34.原流  35.下級  36.無慘  37.同壻  38.官職  39.父親  40.登用  41.文學  42.人生  43.慘憺  44.昇華  45.妥當  46.痕迹  47.工事  48.産室  49.現場  50.計劃  51.始作  52.建築  53.資材  54.威容  55.包圍  56.毁損  57.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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