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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鄕歌)란 누구의 노래인가?


매화향(梅花香)남풍(南風)에 실리어 오솔길을 따라 잰걸음으로 북진(北進)하더니만 그만 시샘 한파(寒波)에 주춤거린다.
철 일찍 꽃망울을 터트린 목련 꽃잎이 제대로 피지도 못해보고 찬바람에 얼어버렸다.
인간(人間)뿐만 아니라 자연(自然)까지도 계절(季節)을 모르고 허둥대는 것을 보면 무언가 대책(對策)필요(必要) 할 성 싶다.


철모르고 일찍 개화한 목련이 그만 추위에 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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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느 날 ‘능감동천지귀신(能感動天地鬼神)’으로 유명(有名)향가(鄕歌)서라벌(徐羅伐)에 퍼졌던 적이 있었다.
그 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앞 다투어 향가(鄕歌)를 지어 불렀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인간(人間)자연(自然) 모두 원래(元來)의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 바로 향가(鄕歌)필요(必要)한 때가 아닌가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향가(鄕歌)가 무엇인지, 누가 불렀는지, 왜 서라벌(徐羅伐) 선인(先人)들이 그토록 애타게 향가(鄕歌)를 찾았는지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부분(部分)이 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계림에 있는 충담사의 찬기파랑사뇌가 향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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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부산(釜山)() 신문(新聞)에 ‘한국(韓國)이쿠(俳句) 연구원(硏究院)’에 관한 기사(記事)가 실렸다.
자세히 보는 순간(瞬間) ()기분(氣分)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연구원(硏究院)천년(千年)신라(新羅)고도(古都) 경주(慶州)심장부(心臟部)()을 열었다는 것 때문이다.
다른 나라 시가(詩歌)연구(硏究)하는 연구원(硏究院)이 생기는 것은 문화적(文化的)으로 매우 고무적(鼓舞的)인 일이다.
그러나 천년(千年)신라(新羅)의 노래 향가(鄕歌)역사(歷史)를 오롯이 품고 있는 고도(古都) 서라벌(徐羅伐)향가(鄕歌)관련(關聯)연구원(硏究院)이나 연구소(硏究所)는 없고, 일본(日本)에서 17세기(世紀)완성(完成)시가(詩歌)인 하이쿠 연구원(硏究院)이 생겼다고 하니, 솔직히 반가움보다는 아쉬움이 가슴을 저민다.
또한 우리의 무관심(無關心)고도(高度)상징성(象徵性)을 가진 훌륭한 우리의 시가문학(詩歌文學)이자 정신문화(精神文化)인 ‘향가(鄕歌)’를 너무 홀대(忽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향가 ‘도이장가’의 현장. 신숭겸장군의 지묘사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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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慶州)기행(紀行)하다 보면 커다란 의문(疑問)하나가 항상 길머리를 잡는다.
향가(鄕歌)본향(本鄕)이라고 하면서 향가(鄕歌)관련(關聯)문학비(文學碑)라도 찾을라치면 무지 어렵다.
하나가 있긴 하다.
김알지의 탄생지(誕生地)로 알려진 계림(鷄林)에 가면 향가비(鄕歌碑)가 있다.
앞면엔 충담사(忠談師)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원문(原文)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은 향가(鄕歌)에 대한 설명(說明)이 제법 자세히 적어져 있다.
반갑긴 하지만 왜 이곳에 향가문학비(鄕歌文學碑)가 세워져 있는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충담사(忠談師)관련(關聯)유적(遺蹟)을 찾아 그곳에 세워야 더 의미(意味)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귀정문(歸正門)을 찾기가 어렵다면 삼화령(三花嶺)으로 추정(推定)되는 금오산(金鰲山)에라도 세우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닌가.


경주 황성공원에 있는 목양 오세재 선생 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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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最近)에 반가운 소리가 들려온다.
경주엑스포 분수공원(噴水公園)에 2000년부터 엑스포가 열리는 해마다 향가문학비(鄕歌文學碑)를 세운다고 한다.
처음 <처용가(處容歌)>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도쿄의 재일교포(在日僑胞)주축(主軸)이 되어 이 사업(事業)을 시작하였다고 하니 고마움에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滿足)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선다.
향가문학비(鄕歌文學碑)를 한 곳에 모아 놓는 것도 의미(意味)가 있지만 향가(鄕歌)발상지(發祥地)를 찾아서, 문학비(文學碑)와 함께 노래의 생성(生成) 배경(背景)도 밝혀, 찾아오는 탐방객(探訪客)들에게 올곧게 설명(說明)해야 된다고 판단(判斷)한다.
향가(鄕歌)는 6~7세기에 전성기(全盛期)를 맞이하였다가, 통일(統一) 신라(新羅) 말기(末期 : 진성여왕)에는『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鄕歌集)발간(發刊)되기에 이른다.
그 후 고려시대(高麗時代 : 10세기 중엽, 963~966년경)에 균여대사(均如大師)창작(創作)한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가 현재(現在) 남아 있고, 11세기 전반(前半 : 1021년, 현종) 신하(臣下)들이 지은 <경찬사뇌가(經讚詞腦歌)> 11수가 있었다는 記錄이『현화사비음기(玄化寺碑陰記)』에 보인다.
이보다 100년 후인 12세기 전반(前半 : 1121년) 예종(睿宗)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가『평산신씨고려태사장절공유사(平山申氏高麗太師壯節公遺事)』에 실려 지금 ()하고 있다.
그 후 간간히 명맥(命脈)유지(維持)하다가 시조(時調) 등 다른 장르의 발생(發生)으로 점차(漸次) 소멸(消滅)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혹자(或者)고려(高麗) 의종(毅宗)동래(東萊)로 귀양 간 정서(鄭敍 : 의종 5년, 1151년)가 지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쇠잔기향가(衰殘期鄕歌)라고 하기도 한다. www.pjnonsul.com
   이처럼 향가(鄕歌)는 오랜 기간 동안 우리 민족(民族)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한 문학(文學) 갈래라고 하는데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다고 하겠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대접(待接)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향가(鄕歌)관련(關聯)유적지(遺蹟址)발굴(發掘)하여, 작은 팻말이라도 세워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경주 황성공원에 있는 동리 김시종 선생 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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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慶州) 황성공원(皇城公園)에 가면 문학비(文學碑)가 여러 개 세워져 있다.
고려(高麗)조 해좌칠현(海左七賢 : 임춘. 오세재. 이인로. 조통. 황보황. 이담지. 함순)의 한명인 고창오씨(高敞吳氏) 오세재(吳世才 : 1133~?)의 문학비(文學碑)가 반갑게 나그네를 반긴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www.pjnons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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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바위 戟巖(극암)
북쪽 산마루 우뚝 솟은 저 바위를 北嶺巉巉石(북령참참석)
사람들은 모두 창 바위라 부른다네. 邦人號戟巖(방인호극암)
까마득 멀어 선학타고 오르려하나 逈樁乘鶴晋(형장승학진)
가파르게 높아 하늘 찌를 듯하구나. 高刺上天咸(고자상천함)
자루 꽂아 휘두르며 번갯불 번뜩이고 揉柄電爲火(유병전위화)
창끝 씻으면 서릿발 같이 예리하다오. 洗鎽霜是鹽(세봉상시염)
어느 때 이를 병기로 만들어서 何當作兵器(하당작병기)
교활한 오랑캐를 남김없이 섬멸할까  敗楚亦亡凡(패초역망범)


경주 황성공원에 있는 목월 박영종 선생의 ‘얼룩송아지’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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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밖에『무녀도(巫女圖)』,『등신불(等身佛)』로 우리에게 친숙(親熟)동리(東里) 김시종(金始鐘 : 1913~1995)의 문학비(文學碑), 그리고 나그네의 시인 목월(木月) 박영종(朴泳鐘 : 1916~1978)의 <얼룩송아지> 문학비(文學碑)가 나란히 서 있다.
산책(散策)하다가 느끼는 문향(文香)에 발길을 모으고 있다.
이왕이면 이곳에 향가문학비(鄕歌文學碑)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비단 탐방자(探訪者)뿐일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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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한자
1.北進  2.寒波  3.人間  4.自然  5.季節  6.對策  7.必要  8.鄕歌  9.元來  10.部分  11.韓國  12.記事  13.氣分  14.新羅  15.硏究  16.關聯  17.世紀  18.完成  19.高度  20.精神文化  21.忽待  22.紀行  23.疑問  24.說明  25.遺蹟  26.意味  27.推定  28.主軸  29.事業  30.生成  31.背景  32.判斷  33.發刊  34.創作  35.現在  36.臣下  37.命脈  38.維持  39.發生  40.或者  41.高麗  42.文學  43.異見  44.待接  45.發掘  46.親熟  47.散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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