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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나라 지킨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의 흔적


함박눈이 온 세상(世上)을 분탕질해놓았다.
이리저리 맨발로 입가에 하얀 입김을 뿜으며 뛰어다니는 바둑이 녀석, 온전히 제 세상(世上)이다.
경복궁(景福宮) 넓은 대지(垈地)에 나란히 걸어간 한 쌍의 발자국이 너무나 다정스러워 보인다.
2() () () 서라벌(徐羅伐)한반도(韓半島) 중간(中間)허리를 흐르는 한강가로 이동(移動)해 와서 이젠 그 이름까지도 서울로 하여, 떡 하니 차지하고 있다.
올림픽으로 () 지구상(地球上)소개(紹介)되더니, 월드컵으로 또 한 번 세계인(世界人)들에게 각인(刻印)되어 오늘도 유유히 한강물을 따라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서울 종로구 세검정(조선시대 사관들이 사초를 이곳 물에다 풀어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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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한강(漢江)은 새로운 기적(奇績)매일(每日) 반복(反復)하면서 발전(發展)발전(發展)을 거듭해 가고 있다.
한강이 처음 역사(歷史)에 나타난 것은 기원전(紀元前) 18년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百濟本紀)온조왕조(溫祚王條)백제(百濟)현재(現在)의 서울을 도읍(都邑)으로 삼게 된 내력(來歷)을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하고 있다. www.pjnonsul.com
   ‘주몽(朱蒙)북부여(北夫餘)에서 낳았던 아들이 와서 태자(太子)가 되자, 비류(沸流)온조(溫祚)자신(自身)태자(太子)에게 용납(容納)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臣下)와 함께 남행(南行)하였는데, 따라오는 백성(百姓)이 많았다.
드디어 (北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三角山-에 올라 가히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중략>(이에) 온조(溫祚)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도읍(都邑)을 정하고 열 신하(臣下)보익(輔翼)을 삼아 국호(國號)십제(十濟)라 하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었다.
<중략>()국호(國號)백제(百濟)라고 고쳤다.’ www.pjnonsul.com
   이후(以後) 서울은 493년간 백제(百濟)수도(首都)로써 존립(存立)했던 것이다.
백제(百濟)가 678년의 긴 역사(歷史)를 이루어 왔으니, 서울은 백제(百濟)전체(全體) 역사(歷史)에서 웅진(熊津)부여(夫餘)도읍(都邑)했던 185년을 제외(除外)하고는 줄곧 서울에 도성(都城)을 두었던 것이 된다.
이렇게 긴 역사(歷史) 동안 서울이 수도(首都)였는데도 불구하고, 몇 해 전 서울에선 ‘정도(定都) 600년’ 기념행사(記念行事)를 하였으니, 가까운 조선(朝鮮)역사(歷史)역사(歷史)로 보는 근시안적(近視眼的) 위정자(爲政者)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넘어 애처로워 견딜 수가 없다.
그동안 서울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한산성(漢山城), 한산주(漢山州), 북한산성(北漢山城) 등으로 빈번(頻繁)역사(歷史)등장(登場)했음에도 정도(定都) 행사(行事)간과(看過)해버렸으니, 7백년을 잃어버린 엉터리 축제(祝祭)였음이 만천하(滿天下)에 들어났다고 할 수 있다. www.pjnonsul.com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일연(一然)스님이 잊혀져가던 천년신라(千年新羅)흔적(痕迹)을 골골 발로 다니면서 하나하나 기록(記錄)한 우리 민족(民族) 최고(最高)의 발자취 기록(記錄)이다.
그러나 경상남북도(慶尙南北道)제외(除外)하면 강원도(江原道), 충청도(忠淸道) 일부만(一部分)으로 한정(限定)되어 있어서 항상(恒常) 아쉬움을 남겼다고 하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현금(現今)수도(首都)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219-4번지 세검정초등학교(洗劍亭初等學校)미흡(未洽)하지만, 임전무퇴(臨戰無退) 신라(新羅) 화랑(花郞)화신(化身) 장춘랑(長春郞)파랑(罷郞)을 기린 장의사(莊義寺)터가 있다.
이곳에는 장의사(莊義寺)당간지주(幢竿支柱)화랑상(花郞像)인 듯 늠름(凜凜)하게 서 있고, 기타(其他) 절집 초석(礎石)이 몇 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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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삼국통일(三國統一)군주(君主) 신라(新羅)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시절(時節)이었다.『삼국유사(三國遺事)』와『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장의사(莊義寺)창건(創建) 과정(過程)이 사뭇 다르게 ()하고 있다.
먼저『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奇異) 장춘랑(長春郞)파랑조(罷郞條)기록(記錄)을 보면, www.pjnonsul.com
   ‘처음에 백제(百濟) 군사(軍士)황산(黃山)에서 싸울 때 장춘랑(長春郞)파랑(罷郞)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 후 백제(百濟)를 칠 때 그들이 태종(太宗)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우리는 예전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데, 백골(白骨)이 되어서도 나라를 끝까지 지키고자 부지런히 종군(從軍)하였습니다.
원컨대 ()께서는 우리에게 얼마간 군사(軍士)를 주십시오.” 태종(太宗)은 놀랍고 괴이(怪異)하게 여겨 두 ()을 위하여 하루 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佛經)()하고 또 한산주(漢山州)장의사(莊義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장의사 당간지주(현 서울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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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기록(記錄)장의사(莊義寺) 창건(創建) 내력(來歷)을 보면, www.pjnonsul.com
   ‘10월에 ()조정(朝廷)좌어(坐御)하였을 때 ()청병(請兵)한 회보가 없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외양(外樣)에 나타나자, 홀연히 () 앞에 선신(先臣) 장춘(長春)파랑(罷郞) 같은 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비록 백골(白骨)이나 오히려 보국(輔國)할 생각이 있어 어제 ()에 갔더니 황제(皇帝)대장군(大將軍) 소정방(蘇定方) 등에게 ()하여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내년(來年) 5월에 백제(百濟)를 치기로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大王)께서 하도 골똘히 바라보고 생각하시므로 여기서 알려드리는 것입니다.”하고 말이 그치자 없어져 버렸다.
()이 크게 놀라고 이상히 여겨 장춘(長春)파랑(罷郞) 양가(兩家)자손(子孫)을 후히 ()주고 관리(官吏)에게 ()하여 한산주(漢山州)장의사(莊義寺)개창(開倉)하여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게 하였다.’ www.pjnonsul.com
   같은 이야기를 김부식(金副軾)일연(一然)스님은 이와 같이 다르게 적고 있다.
아마도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관(史觀)으로 비판(批判) 받고 있는 김부식(金副軾)중국(中國)신라(新羅) 원군(援軍) 사실을 도드라지게 기록(記錄)하여 중국(中國)에 대한 보은(報恩)의 냄새를 풍겼다고 할 수 있으며, 몽고(蒙古)침략(侵掠)으로 구겨진 자존심(自尊心)회복(回復)하려는 일연(一然)스님은 백제(百濟)와의 마지막 전쟁(戰爭)신라(新羅) 스스로 수행(遂行)하였음을 강조(强調)하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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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우(境遇)야 어떻든 장춘랑(長春郞)파랑(罷郞)이라는 두 화랑(花郞)의 나라 사랑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감동(感動)시켜 659년 장의사(莊義寺)창건(創建)하여 그들을 추모(追慕)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장의사(莊義寺)추복사찰(追福寺刹)인 셈이다. www.pjnonsul.com
   이후(以後) 장의사(莊義寺)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16대 예종(睿宗 : 1105~1122) ․ 17대 인종(仁宗 : 1122~1146) ․ 18대 의종(毅宗 : 1146~1170) 등이 남경(南京)-지금의 서울-에 행차(行次)하여 절에 머물기도 하였고,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璨幽 : 869~958),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 : 900~975), 자정국존(慈淨國尊) 미수(彌授 : 1240~1327) 등의 고승(高僧)들도 장의사(莊義寺)유숙(留宿)하였음이 고려시대(高麗時代) 금석문(金石文)()하고 있다.
아마도 일연(一然)스님 역시 이 절에 들러 전해 오던 사찰(寺刹) 연기설화(緣起說話)기록(記錄)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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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 와서도 장의사(莊義寺)사찰(寺刹)영광(榮光)을 그대로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 1392~1398)의 정비(正妃)한씨(韓氏)기신제(忌晨祭)를 이곳에서 지낼 정도(程度)번성(繁盛)하던 사찰(寺刹)이었다.
4대 임금 세종(世宗 : 1418~1450)은 이 절에 여러 신하(臣下)기거(寄居)하게 하여 글을 읽도록 하였고, 9대 성종(成宗 : 1469~1494) 역시 젊은 문관(文官)에게 여가(餘暇)를 주어 수학(修學)케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0대 연산군(燕山君 : 1494~1506(시대)에 오면 사찰(寺刹)종말(終末)()하게 된다.
처음 왕위(王位)에 올라서는 장의사(莊義寺)보수(補修)하기도 하였던 폭군(暴君) 연산군(燕山君)은 1506년(연산군 12년) 2월에 절을 헐고 그 자리에 화계(花階)설치(設置)하여 꽃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www.pjnonsul.com
   기생(妓生)주색장(酒色場)으로 만든 원각사(圓覺寺)나, 마구간으로 ()흥천사(興天寺)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多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나라의 제왕(帝王)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 결과(結果)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에서 보듯, 우리는 역사(歷史)에서 교훈(敎訓)을 얻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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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춘랑(莊春郞)파랑(罷郞)백골(白骨)상황(狀況)에서도 변함없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보인 화랑(花郞)들을 추모(追慕)하는 사찰(寺刹)이란 것을 아는지, 그 후로도 장의사(莊義寺)터는 1712년(조선 19대 숙종 38년) 군사훈련소(軍事訓鍊所)연무대(鍊武臺)설치(設置)되었고, 1747년(조선 21대 영조 23년)에는 총융청(摠戎廳)이 들어섰다.
1866년 이후에는 신식(新式) 군대(軍隊)별기군(別技軍)훈련장(訓鍊場)으로 사용(使用)되기도 하였다.
해방(解放) () 1948년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洗劍亭初等學校)가 세워졌다고 한다.


서울 세검정초등학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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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통일(三國統一)원동력(原動力)화랑(花郞)들을 추모(追慕)하여 세운 사찰(寺刹)이 지금은 21세기 화랑(花郞)들을 담금질하는 초등학교(初等學校)가 되어 있으니, 세월(歲月)이 흘렀어도 그 땅의 지기(地氣)는 그대로 두 눈 시퍼렇게 살아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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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을 아무리 부정(否定)해도 나라의 정기(精氣)도도(滔滔)히 흐르는 두만강(豆滿江) 압록강(鴨綠江)마냥 오늘도 1만년(萬年)의 우리 역사(歷史)를 온전히 품고 유유(愉愉)히 흐르고 있다.
지금이라도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바로 세워 자라나는 후세(後世)들에게 올바른 정체성(正體性)을 갖게 해 주어야 한다.
민족(民族) 정체성(正體性) 세우기에 항상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화랑(花郞)이라는데 이젠 더 이상 이이가 있을 수 없다고 하겠다. www.pjnons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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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한자
1.世上  2.垈地  3.中間  4.移動  5.奇績  6.發展  7.現在  8.都邑  9.記錄  10.太子  11.自身  12.容納  13.臣下  14.百姓  15.首都  16.存立  17.全體  18.除外  19.都城  20.頻繁  21.登場  22.行事  23.看過  24.祝祭  25.痕迹  26.恒常  27.現今  28.未洽  29.新羅  30.花郞  31.化身  32.其他  33.礎石  34.君主  35.過程  36.奇異  37.陣中  38.白骨  39.從軍  40.佛經  41.冥福  42.請兵  43.皇帝  44.大王  45.子孫  46.開倉  47.事大主義  48.史觀  49.批判  50.報恩  51.蒙古  52.戰爭  53.遂行  54.境遇  55.感動  56.追慕  57.高僧  58.寺刹  59.榮光  60.程度  61.繁盛  62.寄居  63.餘暇  64.修學  65.終末  66.補修  67.設置  68.妓生  69.多幸  70.帝王  71.結果  72.敎訓  73.狀況  74.軍隊  75.使用  76.解放  77.地氣  78.否定  79.精氣  80.萬年  81.後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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