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1급| 2급| 3급| 4급| 5급| 6급| 7급| 8급

선화공주(善化公主)의 사랑노래 <서동요(薯童謠)> 上


빼어난 맵시의 기와 담장으로 줄 장미가 오월(五月)신부(新婦)처럼 화사(華奢)하게 붉은 볼에 연지를 도도(滔滔)하게 그려 넣고, 감미(甘味)로운 당당한 어깨의 청년(靑年)을 부르고 있다.
해님도 반가워 초례청(醮禮廳) 축가(祝歌)를 온 누리에 퍼지게 하고, 짙어서 터질 듯, 건강(健康)가로수(街路樹) 행렬(行列)이 빨간 주단(朱丹)으로 향가(鄕歌)를 맞이하고 있다.
어디선가 꼴배는 초동(草童)들의 흥얼거림이 바람에 묻어서 반월성(半月城) 주위(周圍)를 에워싸고 있다.


오월의 장미가 특유의 화사함으로 길손을 붙잡고 있다.

www.pjnonsul.com
  
선화공주님은 善化公主主隱
남 몰래 시집가 놓고 他密只嫁良置古
서동방을 薯童房乙
밤에 몰래 안고 가다. 夜矣卯乙抱遣去如
www.pjnonsul.com
   흥겨운 가락에 한껏 고무된 떠꺼머리들은 이 골목 저 골목 서라벌(徐羅伐) 거리를 종횡무진(縱橫無盡) 활보(闊步)하면서 갑자기 천년(千年) 신라(新羅)황도(皇都) 서라벌(徐羅伐)일순간(一瞬間) 저자거리이게 한다. www.pjnonsul.com
   싱그러운 춘록(春綠) 속에서 여름을 거닐던 진평대제(眞平大帝)도 이 노래를 뜻 모르게 따라 부르다가, 대간(大諫)들의 간언(諫言)이 아니었다면 아리따운 셋째 공주 선화(善化)의 이야기라는 것을 모를 뻔 했다.
애지중지(愛之重之) 선화공주(善化公主)가 뿌리도 모르는 ()캐는 놈에게 몰래 시집가 놓고 밤마다 몰래 안고 가다니? ()없는 ()천리(千里) 간다고 했던가. 급기야 <서동요(薯童謠)>는 온 서라벌(徐羅伐) 초동(草童)들의 유행가(流行歌)가 되어버렸다.


경주 보문리에 있는 선화공주의 부왕 ‘진평왕릉’

www.pjnonsul.com
   이 때 신라(新羅)엄격(嚴格)골품제(骨品制)에 의한 족내혼(族內婚)일반화(一般化) 되어 있어서 궁궐(宮闕)에서 자란 공주(公主)왕족(王族)끼리의 혼인(婚姻)용인(容認)되는 사회(社會)였다.
www.pjnonsul.com
   연일(連日) 계속되는 대간(大諫)들의 참소(讒訴)진평대제(眞平大帝)대내외적(對內外的)으로 ‘공주(公主)의 귀양’이라는 극약처방(劇藥處方)을 내린다.
그러나 신라(新羅) 최고(最高)미색(美色)방사기술(房事技術)을 갖춘 미실(美室)-미실(美室)이가 색공(色供)을 바친 사람으로는 남편(男便) 세종전군(世宗殿君)제외(除外)하고 진흥왕(眞興王), 동륜태자(銅輪太子)-진흥왕(眞興王)의 첫째아들, 진지왕(眞智王)-진흥왕(眞興王)의 둘째아들 금륜(金輪), 진평왕(眞平王)-진흥왕(眞興王)손자(孫子)이면서 동륜태자(銅輪太子)의 아들, 사다함(斯多含), 설원랑(薛原郞) 그리고 동생 미생랑(美生郞) 등 이라고 필사본(筆寫本)화랑세기(花郞世紀)』에 ()한다-을 품어 본 진평대제(眞平大帝)유교(儒敎)라는 중국식(中國式) 관습(慣習)으로 자신(自身)을 옥죄어 오는 신라(新羅) 상류층(上流層) 귀족(貴族) 남성(男性)들의 겉치레를 고운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북 익산에 있는 서동(백제 30대 무왕)의 묘인 ‘말통대왕릉’

www.pjnonsul.com
   사실 유학(儒學)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에서 시작되어 ()나라 동중서(董仲舒 : 기원전 176-104)의 건의(建議)국학(國學)으로서 유교(儒敎)공인(公認) 되면서 이후(以後) 이천년(二千年) 동양사상(東洋思想)핵심(核心)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육조시대(六朝時代 : 魏晋南北朝時代, 221~589)에 오면 유교(儒敎)는 다시 심한 뒤틀림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불교(佛敎)도교(道敎)맹위(猛威)불교(佛敎)국교(國敎)선언(宣言)하는 나라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뒤이은 ()당시대(唐時代)에도 마찬가지였다.
() 황실(皇室)도교(道敎)신봉(信奉)하였고, 당시(當時) ()나라와 밀착(密着)외교관계(外交關係)를 가졌던 신라(新羅)영향(影響)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가 되면 상황(狀況)이 바뀌게 된다.
이민족(異民族) ()나라에 내몰려 남쪽으로까지 밀려난 ()으로서는 국면전환(局面轉換)필요(必要)하였고, 국면전환(局面轉換)일환(一環)으로 유교(儒敎) 부흥운동(復興運動)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주희(朱熹 : 1130-1200)에 의해 불교(佛敎)도교적(道敎的) 색채(色彩)가미(加味)유교(儒敎)는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옷으로 바꿔 입고 화려(華麗)하게 역사(歷史)전면(全面)에 다시 등장(登場)하게 되는데 이 때 집성(集成)성리학(性理學)엄밀(嚴密)의미(意味)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유학(儒學)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전북 익산의 마룡지 전경(오른쪽 대나무 있는 곳이 서동의 생가터)[익산시청 제공]

www.pjnonsul.com
   우리나라는 고려(高麗) () 순흥인(順興人 : 현 경북 영주) 안향(安珦 : 1243-1306)이 성리학(性理學)을 가져오게 된다.
당시(當時)부원파(附元派)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의 문란(紊亂)정치행태(政治行態)오백년(五百年) 고려(高麗)가 무너져 가고 있던 상황(狀況) 이였다.
이 때 지방중소지주(地方中小地主) 출신(出身)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성리학(性理學)으로 세상(世上)의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하였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정몽주(鄭夢周 : 1337~1392), 정도전(鄭道傳 : 1337~1398), 이방원(李芳遠 : 1367~1422, 조선 3대왕, ()으로서는 유일(唯一)하게 과거시험(科擧試驗)합격(合格)함) 등의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무인(武人) 출신(出身) 이성계(李成桂 : 1392~1398, 조선 태조)가 손을 맞잡고 조선(朝鮮)개국(開國)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朝鮮) 개국(開國) ()에도 성리학(性理學) 사상(思想)완전(完全)히 뿌리 내리지 못했음을 여러 기록(記錄)()실상(實狀) 파악(把握)가능(可能)하다.
특히 조선(朝鮮) 개국시조(開國始祖)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딸(公主과 결혼(結婚)한 변계랑(卞季良 : 1369~1430)이 이혼(離婚)을 하였다는 데서 극명(克明)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www.pjnonsul.com
   지금 우리가 관습적(慣習的)으로 지켜오고 있는 유교(儒敎)-성리학(性理學)-적 규범(規範)들은 대부분(大部分) 조선(朝鮮) 9대 성종(成宗 : 1457~1494)대 완성(完成)된『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면 무방(無妨)하다 하겠다.


진평왕릉에서 바라본 신라 27대 ‘선덕여왕릉’

www.pjnonsul.com
   아버지 진평대제(眞平大帝)로부터 궁궐(宮闕)을 떠나라는 왕명(王命)은 어린 선화공주(善化公主)에게는 죽음 그 자체(自體)였다.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태어나 흙 한번 밟지 않고 고이 자란 선화공주(善化公主)였지만 그렇다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自身)의지(意志)와는 무관(無關)하게 이미 온 서라벌(徐羅伐)에 퍼진 향가(鄕歌) <서동요(薯童謠)>는 선화(旋花)에게는 귀를 막고서라도 듣기 싫은 노래였다. www.pjnonsul.com
   선화공주(善化公主)대간(大諫)들의 눈을 피해 고명(高名)한 스님을 찾아 반월성(半月城) 안압지(雁鴨池)를 지나, 북천강물을 맨발로 건너 이차돈(異次頓 : 506~527)의 ()이 서려있는 백률사(栢栗寺)칠흑(漆黑) 같은 밤을 헤치고 달려갔을 것이다.
두려움도 무서움도 꽉 다문 입술로 물리치며, 자신의 결백(潔白)증명(證明)하는 데만 온 힘을 기울였다.
저 멀리 언덕위엔 새파란 도깨비불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며 공주(公主)의 앞길을 막았으나, 조그만 손으로 허공(虛空)을 내치면서 종종걸음으로 어둠을 가르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대덕고승(大德高僧)이라도 왕명(王命)은 거스를 수는 없는 것. 선화(善化)는 울면서 발길을 돌려야만 하였다. www.pjnonsul.com
   한편, 선화공주(善化公主)가 예쁘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한달음에 서라벌(徐羅伐)로 달려온 서동(薯童)자신(自身)이 지어서 퍼트린 <서동요(薯童謠)>가 온 골목을 누비는 것을 보고, 쾌재(快哉)를 부르며 느긋하게 공주(公主)가 올 귀양길 어귀에서 밤이슬을 맞고 있었다.
www.pjnonsul.com
   서동(薯童)왕자(王子)라고는 하나 할아버지 혜왕(惠王 : 598~599, 백제 28대왕)과 아버지 법왕(法王 : 599~600, 백제 29대왕)이 왕위(王位)에 오른 지 이태가 지나지 않아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는『삼국사기(三國史記)기록(記錄)을 보면, 서동(薯童)이가 정상적(正常的)으로 궁궐(宮闕)에서 자라지는 못하고,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면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남지 못가에서 과부(寡婦)로 지내다 못의 ()이물교혼(異物交婚)으로 서동(薯童)이를 낳은 어머니는 한 많은 삶을 눈물로 보냈을 것이다.
지금 익산(益山)에 가면 ‘마룡지(馬龍池)’란 연못이 있는데 이곳이 서동(薯童)이가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설화(說話)은유(隱喩)라는 껍데기를 벗기기 전에는 온전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데, ‘남지(南池)()’이라고 하는 서동(薯童)의 아버지는 ()이 곧 왕권(王權)상징(象徵)한다는 의미(意味)()하면 곧 이해(理解)를 할 수 있게 된다.
사실『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백제(百濟)후반기(後半期)로 올수록 <수서(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에는) 여덟 씨족의 대성(大姓)이 있으니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協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목씨(木氏), 국씨(國氏), 백씨(白氏)다.’> 연씨(燕氏), 국씨(國氏), 사씨(沙氏) 등 8대 ()왕권(王權)능가(凌駕)하는 지배세력(支配勢力)으로 성장(成長)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측근(最側近)에서 보좌(輔佐)하는 육좌평(六佐平)은 이들 성씨(姓氏)독점(獨占)하면서 권력(權力)을 나눠 가지고 왕권(王權)견제(牽制)하면서 그들의 세력(勢力)을 넓혀 갔던 것으로 추측(推測)된다.
백제(百濟) 마지막 ()인 의자왕(義慈王 : 641~660)은 자신(自身)의 아들 41명을 좌평(佐平)임명(任命)하는데서 보듯이 백제(百濟)()과 이들 8대 대성(大姓)()의 다툼이 결국 나라를 ()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북 익산의 선화공주의 묘(남편 서동의 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1997년 대법원의 판결로 서동(무왕)과 선화공주의 묘소로 확정되었다>

www.pjnonsul.com
   이런 혼란(昏亂)와중(渦中)에서 태어난 서동(薯童)왕자(王子)신분(身分)을 숨긴 채 몰래 자라고 있다가, 성년(成年)이 되자 대성(大姓)들로 이루어진 귀족(貴族)들을 누를 수 있는 거대(巨大)후원세력(後援勢力)필요(必要)하였을 것이다.
진흥왕(眞興王) 이후(以後) 급격(急激)하게 한반도(韓半島)에서 세력(勢力)을 넓힌 신라(新羅)와의 연결(連結)은 좋은 배경(背景)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동(薯童)진평왕(眞平王)의 셋째 딸 선화공주(善化公主)목표(目標)로 삼아 서라벌(徐羅伐)잠입(潛入)하여 기회(機會)를 엿보고 있다가, 어린이들이 뜻 모르고 즐겨 부르는 동요(童謠)가 끝없이 퍼져나간다는 사실에 서동(薯童)은 무릎을 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 때 서라벌(徐羅伐)에는 <서동요(薯童謠)>와 비슷한 노래가 어린이들 사이에는 즐겨 부르는 동요(童謠)였을 것이다.
급한 서동(薯童)은 기존 <서동요(薯童謠)>에 선화공주(善化公主)자신(自身)의 이름만 살짝 바꾸어서 초동(草童)들에게 ()로서 부르게 하였다고 판단(判斷)된다. www.pjnonsul.com
   서동(薯童)이의 계책(計策)에 휘말려 생이별(生離別)을 하게 된 진평대제(眞平大帝)는 하루도 편히 지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황룡사지(黃龍寺址)분황사(芬皇寺)를 지나 보문(普門)으로 몇 발짝 가면 ‘숲머리 마을’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한길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包裝)길을 따라 가다보면 이국정서(異國情緖)가 물씬 풍기는 그림 같은 펜션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서라벌(徐羅伐)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들어오고, 천년신라(千年新羅)의 향내를 지척(咫尺)에서 맡을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아닌가 한다.
붉은 장미는 예서도 예외 없이 자꾸만 탐방자(探訪者)의 발목을 붙잡음을 느끼면서, 선화공주(善化公主)의 혼은 아버지 진평대제(眞平大帝)영면(永眠)하고 있는 ‘숲머리 마을’ 앞 넓은 들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봉분(封墳) 주위(周圍)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www.pjnonsul.com
   아름다운 석양(夕陽)낭산(狼山) 산정(山頂)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위를 호위(護衛)하듯 둘러쳐 있고, 이곳 아버지 진평대제(眞平大帝)음택(陰宅)까지도 함께 감싸 안고서 애틋한 부녀간(父女間)()을 저승이 아닌 이승에서 도란도란 하고 있다.
www.pjnonsul.com
   www.pjnonsul.com
  
본 사이트의 모든 기능 및 글에 대한 저작권 보호가 되어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연락을 바랍니다.   

본문의 한자
1.華奢  2.甘味  3.靑年  4.健康  5.行列  6.鄕歌  7.周圍  8.縱橫無盡  9.闊步  10.新羅  11.皇都  12.諫言  13.愛之重之  14.嚴格  15.宮闕  16.公主  17.王族  18.婚姻  19.容認  20.社會  21.讒訴  22.美色  23.男便  24.除外  25.孫子  26.儒敎  27.慣習  28.自身  29.貴族  30.男性  31.儒學  32.建議  33.國學  34.公認  35.佛敎  36.道敎  37.猛威  38.國敎  39.宣言  40.皇室  41.信奉  42.密着  43.影響  44.狀況  45.必要  46.色彩  47.加味  48.華麗  49.登場  50.集成  51.嚴密  52.意味  53.高麗  54.紊亂  55.世上  56.合格  57.開國  58.思想  59.完全  60.記錄  61.實狀  62.把握  63.可能  64.結婚  65.克明  66.規範  67.完成  68.無妨  69.王命  70.自體  71.九重宮闕  72.意志  73.無關  74.高名  75.潔白  76.證明  77.虛空  78.所聞  79.快哉  80.王子  81.東家食西家宿  82.寡婦  83.說話  84.王權  85.象徵  86.成長  87.姓氏  88.獨占  89.權力  90.牽制  91.勢力  92.推測  93.任命  94.渦中  95.身分  96.成年  97.急激  98.背景  99.目標  100.機會  101.童謠  102.判斷  103.計策  104.包裝  105.咫尺  106.封墳  107.夕陽  108.山頂  109.護衛 



Copyright (c) 2016 pjnonsul All rights reserved. | 이메일 : master@badati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