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1급| 2급| 3급| 4급| 5급| 6급| 7급| 8급

황산벌에 수놓은 관창(官昌)의 용맹(勇猛)


정해년(丁亥年)황금(黃金)돼지라는 행운(幸運)을 안고, 우리네 얼어붙은 가슴에 희망(希望) 덩어리를 던져 놓는다.
2007년 올해는 지난해의 먼지 찌꺼기들을 모두 지구(地球) 밖으로 날려 보내어, 진정(眞情)으로 민초(民草)들이 편안(便安)한 삶을 영위(營爲)할 수 있게 갱제(?)를 살려 달라고, 높은 곳에 계시는 모든 분들께 간절(懇切)히 바래본다.
매년(每年) 하는 소망(所望) 품기지만 올핸 왠지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란 희망(希望)을 가진다. www.pjnonsul.com
   향가(鄕歌)화랑(花郞)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닌 지도 벌써 () ()이 가까워져 온다.
새싹이 움트는 이른 봄 처음 향가(鄕歌)의 향내 맡기를 시작(始作)하였을 땐 호드기 소리에 종달새가 지지배배 하던 때였다.


충남 논산의 황산벌(현 계백장군묘역 뒤편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www.pjnonsul.com
   까까중 떠꺼머리 종내기들의 물장구 소리가 신작로(新作路)를 가로질러 양반집 규방(閨房)에까지 다다르면 별당(別堂)아씨 속내만 핑크빛으로 묻어나던 여름에도 굵은 땀방울을 동무 삼아 이 고을 저 고을을 다녔었다.
www.pjnonsul.com
   들판이 황금(黃金)빛으로 익어가던 어느 가을날, 노란 단풍(丹楓) 이파리 하나가 연서(戀書)를 재촉하였을 때도 묵묵히 발걸음을 내디뎠었다. www.pjnonsul.com
   지금 하이얀 솜털 같은 눈꽃송이 한아름 품어다가, 그날 황산(黃山)벌에서 서라벌(徐羅伐) 청년(靑年)표상(表象)을 남긴 화랑(花郞) 관창(官昌)에게 따뜻하게 바치고 싶다.


충남 논산에 있는 계백장군 묘소[논산시청 제공]

www.pjnonsul.com
   때는 신라(新羅)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이었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백제(百濟)심장부(心臟部)()하여 거침없는 행보(行步)계속(繼續)하던 백제(百濟)로써는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때였다.
백제(百濟) 31대 의자왕(義慈王 : 641~660)은 서동요(薯童謠)주인공(主人公) 30대 무왕(武王 : 600~641)의 원자(元子)로 때어나 무왕(武王) 33년에야 비로소 태자(太子)()해졌다.
모후(母后)선화공주(善化公主)와의 불화(不和)원인(原因)이라고 보는 시각(視覺)존재(存在)하지만 이것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의자왕(義慈王)등극(登極)() 초기(初期)에는 사적(私的)으로 큰 이모(姨母)신라(新羅)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여러 차례 전쟁(戰爭)을 하였다.
미후성(獼猴城)등 40여개 ()을 빼앗기도 하였고, 특히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되는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품석(品石)과 딸 고타소(古陀炤)대야성(大耶城) 전투(戰鬪)에서 죽이게 된다.
그러나 이후 의자왕(義慈王)성충(成忠)충신(忠臣)들의 충언(忠言)을 귓등으로 듣고, 또한 자신(自身)의 자녀 33명을 좌평(佐平)임명(任命)하는 등 국정(國政)을 어지럽게 하였다.
물론 연씨(燕氏) 국씨(國氏)백제(百濟) 8대 대성(大姓)들 집안의 왕권(王權) 견제(牽制)에 이골이 나서 왕권강화(王權强化) 차원(次元)에서 왕자(王子)들을 무더기 좌평(佐平)임명(任命)하였다고 보는 연구(硏究)가 있긴 하지만 지나친 것만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결국 사비성(泗泌城)()노도(怒濤)와 같이 쳐들어오는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자왕(義慈王)은 온갖 방법(方法)으로 회유(懷柔)를 해보지만 역부족(力不足)이었다.
난세(亂世)영웅(英雄)이 난다고 했던가. www.pjnonsul.com
   백제(百濟)에는 달솔(達率) 계백(階伯)이 있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을 보면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20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나라 군대(軍隊)는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와 더불어 백제(百濟)를 치려고 하였다.
이때 계백(階伯)은 5천 결사병(決死兵)을 뽑아 대항(對抗)하면서 말하였다.


충북 영동에 있는 중갱이골

www.pjnonsul.com
   “한 나라 사람이 ()나라와 신라(新羅)대군(大軍)을 당해내야 하니 국가(國家)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자식(子息)들이 포로(捕虜)로 잡혀 노비(奴婢)가 될지 모르는데, 살아서 ()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 하고는 가족(家族)을 모두 죽였다.
이윽고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새 진영(陣營)설치(設置)하고 신라(新羅)군사(軍士)를 맞아 싸울 때 뭇 사람에게 맹서(盟誓)하였다.
www.pjnonsul.com
   “옛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軍士)격파(擊破)하였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各自) 용기(勇氣)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은(國恩)보답(報答)하자.” 하면서 힘을 다하여 싸우니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내었다.
그래서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決死隊)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軍士)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擊破)하였다.
www.pjnonsul.com
   사력(死力)을 다해 막는 백제(百濟) 결사대(決死隊)용맹(勇猛)함에 서서히 신라군(新羅軍)사기(士氣)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에 신라진영(新羅陣營)에서는 온갖 묘안(妙案)을 다 내어보지만 마땅한 방법(方法)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때였다.
신라장군(新羅將軍) 품일(品日)의 16세 어린 아들 관창(官昌)이 홀로 적진(敵陣)으로 돌진(突進)하였다.
일찍이 화랑(花郞)에 들어 무예(武藝)정신무장(精神武裝)까지도 갖춘 화랑(花郞) ()화랑(花郞)으로 다져진 관창(官昌)이었다.
진흥왕대(眞興王代)화랑(花郞) 사다함(斯多含)이 15세의 어린나이에 반란(叛亂)을 일으킨 대가야(大伽倻)일거(一擧)평정(平正)한 적이 있었지만, 단신(單身)으로 적진(敵陣)으로 돌격(突擊)하여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한 것은 화랑(花郞) 관창(官昌)유일(唯一)하다 할 수 있다.
이때의 일을『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 관창(官昌 : 645~660()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다. www.pjnonsul.com
   660년(태종무열왕 7년) 백제(百濟)황산(黃山)벌-현 충남 논산-에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계백(階伯)이 이끄는 백제(百濟)의 5천 결사대(決死隊)대치상태(對峙狀態)계속(繼續)되고 있었다.
관창(官昌)의 아버지 품일(品日)은 아들에게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氣槪)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功名)을 세워 부귀(富貴)()할 수 있는 때이니 어찌 용기(勇氣)가 없을 손가?” 하였다.
관창(官昌)은 곧바로 “예”하고는 말에 올라 창을 빗겨들고 적진(敵陣)진격(進擊)하여 용감(勇敢)히 싸웠으나 수적(數的) 열세(劣勢)포로(捕虜)가 되고 말았다.
이윽고 백제(百濟)원수(元帥) 계백(階伯)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階伯)관창(官昌)의 투구를 벗겨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관창(官昌)이 나이가 어리고 용기(勇氣)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놀란 계백(階伯)은 차마 관창(官昌)을 죽이지 못하고 탄식(歎息)하기를 “신라(新羅)에는 뛰어난 병사(兵士)가 많다.
소년(少年)이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년(長年) 병사(兵士)들이야!” 하고는 살려 보내기를 허락(許諾)하였다. www.pjnonsul.com
   관창(官昌)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지(敵地)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將帥)의 목을 베지 못하고, 그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러운 바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成功)할 수 있다.”하고는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敵陣)돌진(突進)하여 민첩(敏捷)하게 싸우니 하는 수 없이 계백(階伯)관창(官昌)을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내었다.


품관사(현 금성사) 전경

www.pjnonsul.com
   이에 관창(官昌)의 아버지 품일(品日)은 그 머리를 손으로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왕실(王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後悔)가 없다.” 하였다.
전군(全軍)이 이를 보고 용기(勇氣)를 내어 뜻을 세워 북을 요란(擾亂)하게 쳐 진격(進擊)하니 백제(百濟)가 크게 ()하였다라고 김부식(金富軾)화랑(花郞) 관창(官昌)열전(列傳)을 세워 상세(詳細)()하고 있다. www.pjnonsul.com
   사실 관창(官昌)용기(勇氣)화랑세속오계(花郞世俗五戒) () 임전무퇴(臨戰無退)해당(該當)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서라벌(徐羅伐) 젊은 화랑(花郞)들은 통일전쟁(統一戰爭)수행(遂行)하는 동안 전군(全軍)사표(師表)로써 존재(存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어린 나이에 단신(單身)으로 적진(敵陣)돌격(突擊)할 수 있는 용기(勇氣)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현금(現今)을 사는 우리들이 한번쯤 곱씹어 보아야 할 부분(部分)인 것 같다. www.pjnonsul.com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에 가면 관창(官昌)관련(關聯)설화(說話)가 아직도 생생히 그날을 말해주고 있다.
관창(官昌)은 아버지 품일(品日)을 따라 백제(百濟) 정벌(征伐)을 위해 진군(進軍)할 때 이곳 부용리를 지나갔다고 한다.
당시 신라군(新羅軍)출정(出征)하면서 부용산 골짜기 ‘중갱이골’에서 야영(野營)을 하였고, 아들 관창(官昌)을 잃은 품일장군(品日將軍)개선(凱旋)하며 돌아올 때 역시 이곳을 지나면서 아들 관창(官昌)명복(冥福)을 비는 심정(心情)에서 ‘중갱이골’에 절을 짓고 아버지 품일(品日)과 아들 관창(官昌)의 이름을 따서 품관사(品官寺)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 품관사(品官寺)가 있던 자리에는 금성사(錦城寺)란 낯선 이름의 사찰(寺刹)이 있다.
금성사(錦城寺)해방(解放) ()에 새롭게 개축(改築)되었다고 한다. www.pjnonsul.com
   서라벌(徐羅伐)을 떠나 황산(黃山)벌까지의 진군(進軍)당시(當時)로써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행군(行軍)으로 지친 병사(兵士)들의 사기(士氣)를 돋우고, 전쟁(戰爭)에서 승리(勝利)를 이룩하는 데는 화랑(花郞)들의 올곧은 정신(精神)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現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화랑정신(花郞精神)이야말로 가장 본받아야 할 무형(無形)의 훌륭한 유산(遺産)이라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www.pjnonsul.com
   www.pjnonsul.com
   www.pjnonsul.com
   www.pjnonsul.com
  
본 사이트의 모든 기능 및 글에 대한 저작권 보호가 되어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연락을 바랍니다.   

본문의 한자
1.幸運  2.希望  3.地球  4.眞情  5.便安  6.營爲  7.懇切  8.所望  9.鄕歌  10.花郞  11.始作  12.閨房  13.丹楓  14.靑年  15.表象  16.新羅  17.行步  18.繼續  19.風前燈火  20.元子  21.太子  22.原因  23.視覺  24.存在  25.登極  26.初期  27.私的  28.戰爭  29.品石  30.戰鬪  31.忠臣  32.忠言  33.自身  34.任命  35.國政  36.王權  37.牽制  38.王子  39.硏究  40.怒濤  41.方法  42.懷柔  43.英雄  44.軍隊  45.對抗  46.大軍  47.存亡  48.子息  49.捕虜  50.奴婢  51.家族  52.陣營  53.設置  54.盟誓  55.擊破  56.各自  57.勇氣  58.報答  59.勇猛  60.士氣  61.妙案  62.敵陣  63.突進  64.一擧  65.單身  66.突擊  67.肝膽  68.記述  69.氣槪  70.功名  71.富貴  72.進擊  73.勇敢  74.元帥  75.兵士  76.少年  77.長年  78.敵地  79.將帥  80.成功  81.敏捷  82.王室  83.後悔  84.全軍  85.詳細  86.該當  87.遂行  88.師表  89.現今  90.部分  91.關聯  92.說話  93.征伐  94.進軍  95.野營  96.凱旋  97.冥福  98.心情  99.寺刹  100.解放  101.改築  102.行軍  103.精神  104.現在  105.無形  106.遺産 



Copyright (c) 2016 pjnonsul All rights reserved. | 이메일 : master@badati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