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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제의 화랑흔적과 휴도왕과의 관계 上


분황사(芬黃寺)를 지나 보문호반(普門湖畔)으로 가는 길은 얼음왕자(王子)가 휘몰아쳐, 이젠 계절(季節)의 언저리가 차가운 바람으로 온통 드날리고 있다.
단풍(丹楓)잎 하나가 애처로이 매달려 있는 스산한 가로수(街路樹) 길이 아직은 푸른 북천변(北川邊) 축구장(蹴球場) 잔디밭과 ()대조(對照)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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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三韓)통합(統合)하고 ()나라까지 완전(完全)히 이 땅에서 축출(逐出)하고, 진정(眞正)민족(民族)() 통합(統合)을 이룬 () 전쟁(戰爭) 화마(火魔)중심(中心)에 섰던 백성(百姓)들을 위무(慰撫)하고자, 무장사(䥐藏寺)에 병장기(兵仗器)를 묻고 다시는 금수강산(錦繡江山)전쟁(戰爭)을 없애겠다고 다짐하였던 분이 바로 신라(新羅) 30대 문무대제(文武大帝)이다.


심산에 꼭꼭 숨어있는 무장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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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朝鮮時代) 경주김씨(慶州金氏) 월성위(月城尉) 봉사손(奉祀孫)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 1786~1856(선생)도 여러 차례 무장사지(䥐藏寺址)를 찾아 무장사비(䥐藏寺碑) 파편(破片)수습(收拾)하였다고 하니, 그 중요성(重要性)은 비단 비문(碑文)의 글자체뿐만 아니라 무장사(䥐藏寺)를 창건(創建)독특(獨特)사찰(寺刹)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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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사지(䥐藏寺址)를 찾을 생각으로 나섰던 발걸음은 이미 덕동호(德洞湖)를 넘고 있었고, 추령재의 백년찻집에서 풍기(風氣)는 짙은 녹차 향기(香氣)가 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斟酌)하고 있었다.
찻집 주차장(駐車場) 옆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수많은 다기(茶器)들이 가지런히 진열(陳列)되어 있어, 서라벌(徐羅伐)을 찾는 관광객(觀光客)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提供)해 주고 있다.
정갈한 차 한 잔이 시끌벅적 도심(都心)의 찌든 머리를 속까지 맑게 하는 것 같다.
가만히 다향(茶香)심취(深醉)해 있는 탐방자(探訪者)에게 어디선가 재촉의 음성(音聲)이 들려온다.


추령재 정상에 있는 백년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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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 추령재를 넘어 대종(大鐘)의 피울음 소리를 들으러 확 트인 동해(東海) 바다로 가자. www.pjnonsul.com
   요즘은 추령을 관통(貫通)한 터널을 이용(利用)하면 손쉽게 양북면 어일리에 도착(到着)할 수 있다.
그러나 옛 추억(追憶)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추령을 넘는 길은 꼬불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이지만, 과거(過去)를 만나려는 사람들에게 이 길은 매우 유익(有益)한 드라이브 코스이다.
또 아는가, 20세기 초 사라진 한국산(韓國産) 호랑이라도 만날 수 있을는지… www.pjnonsul.com
   꼬부랑 고갯길을 벗어나면 오른편으로 장항사지(獐項寺址) 이정표(里程標)가 보이고, ()이어 기림사(祈林寺)골굴사(骨窟寺)를 알리는 정겨운 팻말이 오늘은 추위 때문인지 얼어붙어 있다.
제법 너른 들판이 나타난다.
벼 벤 그루터기에는 파아란 새싹이 몇 개 솟아 있을 뿐 무채색(無彩色) 일색(一色)이다.


문무왕 해중릉을 찾아가다 이곳에서 녹차의 진한 향내를 맡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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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新羅) 30대 문무대제(文武大帝 : 661~681)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원자(元子)이며, 어머니는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 : ?~?)의 딸, 곧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 : 595~673)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서악(西岳) 오줌 설화(說話)유명(有名)여장부(女丈夫)이기도 하다.
또한 이 오줌 설화(說話)고려(高麗)창건(創建)태조(太祖) 왕건(王建 : 877~943)의 건국설화(建國說話)재탄생(再誕生)되기도 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법민(法敏)-문무대제-은 외모(外貌)영특(英特)하고 총명(聰明)하여 지략(智略)이 많았다라고 기록(記錄)하여, 그의 인품(人品)통일(統一)완성(完成)군주(君主)로써 손색(遜色)이 없었음을 알려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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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대제(文武大帝)결단력(決斷力)을 높이 살 수 있는 가장 중요(重要)사건(事件) 하나는 전세계(全世界)에 그 유례(類例)전무(全無)수중릉(水中陵) 부분(部分)이다.
지금 우리가 대왕암(大王岩)이라고 부르는 봉길리 앞바다의 작은 돌섬이 문무대제(文武大帝)화장(火葬)하여 조성(造成)수중릉(水中陵)으로 보고 있다.
문무대제(文武大帝)즉위(卽位) 21년(681) 7월 1일에 56세-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기록(記錄)되어 있다-를 일기(一期)붕어(崩御)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臣下)들이 유언(遺言)에 의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장사(葬事)하였다고 한다.
유언(遺言)을 보면, www.pjnonsul.com
   ‘분묘(墳墓)란 것은 한갓 재물(財物)허비(虛費)하고 기평(譏評)-헐뜯는 평론-을 사책(史冊)에 남길 뿐이며, 헛되이 인력(人力)노비(勞費)-품삯-하고 유혼(幽魂)을 오래 머물게 하지 못한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상통(傷痛)-마음이 몹시 괴롭고 아프다-을 금치 못하겠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나의 즐겨 ()하는 바가 아니다.
속광(屬纊)-임종- 후 10일에는 곧 고문(庫門) 외정(外庭)에서 서국(西國)-인도-식에 의하여 불로 소장(燒葬)-화장-할 것이며,’라고 자신(自身)이 죽으면 거대(巨大)고분(古墳)을 만드는 수고로움에 백성(百姓)들을 동원(動員)하지 말고, 간소(簡素)화장(火葬)으로 장례(葬禮)를 치르라고 구체적(具體的)으로 지시(指示)를 하고 있다.


잘 진령된 다기들이 길손을 오래도록 머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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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금(現今) 나라의 지도자(指導者)들은 화장(火葬)대세(大勢)라고 온갖 매스컴을 동원(動員)하여, ‘좁은 땅덩어리 운운(云云)하며’ 새로운 장묘문화(葬墓文化) 정착(定着)을 위해 열변(熱辯)()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렇게 외치는 지도자(指導者) 그 어느 누구도 자신(自身)조상묘(祖上墓)전국(全國) 내로라하는 최고수(最高手) 풍수지리(風水地理) 일인자(一人者)동원(動員)하여,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가 난다는 명당(明堂)을 쥐새끼처럼 물색(物色)하여, 새롭게 떡 하니 이장(移葬)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천벌(天罰) 받을 짓인 당대발복(當代發福)()한다고 한다.
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指導者)들의 행태(行態)치고는 너무나 치졸(稚拙)하여 말 섞고 싶지 않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表現)일까. 삼한통합(三韓統合)주역(主役)문무대제(文武大帝)의 나라 사랑과 비교(比較)하면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웃을 일이다.
지금이라도 과감(果敢)대세(大勢)에 따르는 것이 더 이상의 손가락질을 피하는 방법(方法)이 아닐까. 무리한 희망사항(希望事項)을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나 자신이 무지(無知)극치(極値)를 달리고 있는 것 같아 무지 씁쓰레하다.


장항리사지의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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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암(大王岩)문무대제(文武大帝)수중릉(水中陵)으로 명명(命名)되기까지 여러 차례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다.
원래(元來) 문무왕릉(文武王陵)으로 알려진 괘릉(掛陵)-경주시 외동읍 소재(所在), 현재(現在) 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으로 추정(推定)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화장(火葬)하였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을 조선후기(朝鮮後期)(1712년경) 경주부윤(慶州府尹) 권이진(權以鎭)인접(隣接)한 곳에 숭복사(崇福寺)가 있음에 비추어-『三國遺事』 기록(記錄) 참조(參照)- 괘릉(掛陵)이 원성왕릉(元聖王陵 : 785~799)이라고 추정(推定)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항리사지 좌대. 해학적으로 조각된 사천왕상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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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1955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 1892~1950(선생)에 의해 괘릉(掛陵)문무왕설(文武王說)부정(否定)되었고, 1967년 5월 17일 () 일간신문사(日刊新聞社)주관(主觀)삼산오악조사단(三山五嶽調査團)문무왕릉(文武王陵) 발견보도(發見報道)가 있은 () 경주김씨 문중(門中)에서는 5~6년의 논의(論議) 끝에 문무왕릉(文武王陵)괘릉설(掛陵說)철수(撤收)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73년경 이곳 대왕암(大王岩)문무왕릉(文武王陵)으로 받아 들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주민(住民)들은 조선전기(朝鮮前期) 이전(以前)부터 이 바위섬을 대왕암(大王岩)으로 불렀다고 하니, 문헌기록(文獻記錄)미진(未盡)부분(部分)민간전승(民間傳承)에서 찾아야 한다는 평범(平凡)진리(眞理)를 다시 한 번 확인(確認)한 셈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장골(藏骨)이냐, 산골(散骨)이냐의 논란(論難)중심(中心)에 서 있지만 말이다. www.pjnonsul.com
   봉길리 앞바다는 오늘도 검푸르게 대왕릉(大王陵)을 품고 있다.
한 떼의 갈매기만 나선형(螺旋形)으로 호국용(護國龍)이 된 문무대제(文武大帝)호위(護衛)하는 것 같다.
감포(甘浦) 쪽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 몇 그루의 해송(海松)이 조그만 동산을 만들고 있다.
이곳이 해룡(海龍)이 된 문무대제(文武大帝)가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 : 681~692)에게 신라삼보(新羅三寶) () 두 가지 보물(寶物)()하였다는 이견대(利見臺)가 있다.


경주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문무왕 해중릉인 ‘대왕암’[국제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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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대 신문왕(神文王)왕위(王位)에 오른 직후(直後)부터 김흠돌(金欽突)()귀족세력(貴族勢力)과의 힘겨루기로 지쳐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흠돌(金欽突)풍월주(風月主)를 지낸 화랑(花郞) 출신(出身)이면서 문무대제(文武大帝)의 죽음까지도 비밀(秘密)에 붙이고 ()을 일으킨 것을 보면, 왕권(王權) 찬탈(簒奪)을 노린 것만은 사실(史實)로 여겨진다.
이에 문무대제(文武大帝)황후(皇后) 자의태후(慈儀太后)화랑(花郞)폐지(廢止)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문왕(神文王)은 새로운 청소년(靑少年) 학습기관(學習機關)국학(國學)창설(創設)하여,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와해(瓦解)시키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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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왕(神文王)은 이와 더불어 죽어서 동해(東海)해룡(海龍)이 된 부왕(父王) 문무대제(文武大帝)와의 만남을 기정사실(旣定事實)서라벌(徐羅伐)회자(膾炙)되게 하여 유훈통치(遺訓統治)시작(始作)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해룡(海龍)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하고, 신라삼보(新羅三寶) () 옥대(玉帶)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이곳에서 얻었다고 하는 것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다.
또한 부왕(父王) 문무대제(文武大帝)초석(礎石)을 놓았으나 완공(完工)하지 못한 진국사(鎭國寺) 건립(建立)완성(完成)하여, 감은사(感恩寺)라 바꿔 ()하면서 유훈통치(遺訓統治)를 이어나갔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해룡(海龍)으로 ()문무대제(文武大帝)해류(海流)를 타고 출입(出入)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흐트러진 민심(民心)통일군주(統一君主) 부왕(父王) 문무대제(文武大帝)이용(利用)하여 수습(收拾)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문무왕을 화장한 터라고 알려진 낭산 기슭의 능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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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통일기(三國統一期)에 오면 신라(新羅)화랑제도(花郞制度)를 더욱 정비(整備)하여, 대업(大業)의 방패로 삼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事實)이다.
여기서 할아버지 용춘공(龍春公)-13세 풍월주(風月主)-과 아버지 춘추공(春秋公)-18세 풍월주(風月主)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모두 화랑(花郞) 우두머리 풍월주(風月主)를 엮임 하였는데, 그 직계(直系)문무대제(文武大帝)화랑(花郞) 무리와 무관(無關)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釋然)치 않은 것 같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문무왕 해중릉인 ‘대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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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주군 언양읍 천전리 각석(刻石)에 20여명의 화랑(花郞)의 이름이 예각(銳刻)되어 있다.
() 법민랑(法民郞)이란 이름도 새겨져 있다.
비록 한자(漢字)는 다르지만-『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화랑세기(花郞世紀)』 모두 법민(法敏)으로 표기(表記)되어 있다- 혹시(或是) 문무대제(文武大帝)왕위(王位)에 오르기 () 화랑(花郞)무리에서 활약(活躍)근거(根據)가 아닐까. 아직은 문헌증거(文獻證據) 부족(不足)으로 가부(可否)판단(判斷)하는 것은 성급(性急)하다고 할 수 있으나, 문무대제(文武大帝)화랑(花郞)연관성(聯關性)을 밝혀 줄, 중요(重要)사실(史實)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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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한자
1.王子  2.季節  3.丹楓  4.對照  5.統合  6.完全  7.逐出  8.眞正  9.戰爭  10.中心  11.百姓  12.慰撫  13.錦繡江山  14.新羅  15.破片  16.收拾  17.碑文  18.獨特  19.寺刹  20.過言  21.風氣  22.香氣  23.斟酌  24.提供  25.都心  26.音聲  27.貫通  28.到着  29.追憶  30.九折羊腸  31.過去  32.一色  33.元子  34.說話  35.高麗  36.外貌  37.英特  38.聰明  39.記錄  40.人品  41.完成  42.君主  43.重要  44.事件  45.全無  46.部分  47.火葬  48.造成  49.卽位  50.崩御  51.臣下  52.墳墓  53.財物  54.虛費  55.庫門  56.自身  57.古墳  58.動員  59.簡素  60.葬禮  61.指示  62.現今  63.大勢  64.云云  65.熱辯  66.全國  67.風水地理  68.物色  69.移葬  70.天罰  71.當代發福  72.稚拙  73.表現  74.主役  75.比較  76.三尺童子  77.果敢  78.方法  79.無知  80.命名  81.元來  82.所在  83.現在  84.推定  85.參照  86.否定  87.主觀  88.門中  89.住民  90.平凡  91.眞理  92.確認  93.護衛  94.寶物  95.直後  96.花郞  97.秘密  98.王權  99.史實  100.皇后  101.廢止  102.國學  103.貴族  104.勢力  105.瓦解  106.父王  107.膾炙  108.始作  109.礎石  110.建立  111.大業  112.事實  113.無關  114.釋然  115.表記  116.或是  117.根據  118.不足  119.可否  120.判斷  121.性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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