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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상징 <도이장가(悼二將歌)>


황사(黃紗)가 잔뜩 머금은 봄을 숨 막히게 하더니만 지나가자, 이내 은행잎사귀가 조그만 애기 손 마냥 하늘을 ()해 오물조물 한다.
환한 벚꽃 잔치에도 초대(招待)받지 못하다가, 비로소 기지개를 켜는 묵묵한 은행(銀杏)의 기다림이란 그래서 수백 년을 사는가 보다.


은행잎이 이미 가을 하늘을 노랗게 수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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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은행(銀杏)나무보다도 더 오랜 충절(忠節)을 가진 두 장군(將軍)이 있어 자신(自身) 있게 소개(紹介)해 본다.
먼저 두 분의 장군(將軍)추모(追慕)향가(鄕歌)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있어 함께 불러보기로 한다. www.pjnonsul.com
  
임금님을 구하여 내신   主乙完乎白乎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매   心聞際天及昆
넋은 갔지만   魂是去賜矣中
내려주신 벼슬이야 또 대단 했구나   三烏賜敎職麻又欲
바라다보면 알 것이다.
  望彌阿里刺
그 때의 두 공신이여   及波可二功臣良
이미 오래 되었으나   久乃直隱
그 자취는 지금에 나타났도다.
  跡烏隱現乎賜丁 <將節公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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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고려(高麗) 16대 임금 예종(睿宗) 15년(1120), ()서경(西京)팔관회(八關會)참석(參席)했을 때였다.
허수아비 둘이 관복(官服)을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이 이상히 여겨 물었더니, 좌우(左右)에 있던 신하(臣下)들이 그 경위(經緯)설명(說明)하였다.
장군(將軍)충절(忠節)을 들은 예종(睿宗)즉시(卽時) 향가(鄕歌) <도이장가(悼二將歌)>-두 장군(將軍)추모(追慕)하는 노래-를 지어 그들을 추모(追慕)하였다고 한다.


대구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지묘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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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아비 둘은 신숭겸(申崇謙 : ?~927)과 김락(金樂 : ?~927(장군)이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 : 10년, 927)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900~935)과 팔공산(八空山)에서 싸우다가 포위(包圍)되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이때 체구(體軀)가 비슷한 신숭겸(申崇謙)()어가(御駕)를 타고 싸우다가 김락(金樂)장군(將軍)과 함께 전사(戰死)하였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두 장군(將軍)의 죽음을 애통(哀慟)하게 여겨 그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禮葬)하고, 두 장군(將軍)전사(戰死)한 곳에 지묘사(智妙寺)-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를 세워 명복(冥福)을 빌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몸은 머리가 없어진 ()였다.
이에 왕건(王建)순금(純金)으로 머리를 만들게 하여 장례(葬禮)를 지냈다.
그러나 왕건(王建)은 걱정이었다.
금두상(金頭狀)이 무덤 속에 있는 것을 아는 ()들이 혹시 도굴(盜掘)이라도 하는 날엔, 자신(自身)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바친 신숭겸(申崇謙)에게 예의(禮儀)가 아닌 것이었다.
고심(苦心)하던 왕건(王建)()를 일단, 춘천(春川)팔공산(八空山) 그리고 구월산 등 세 곳에 만들라고 하였다.
또한 춘천(春川)()를 만들면서 역시 봉분(封墳)을 세 개 만들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르게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춘천(春川)에 있는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장군(將軍)()봉분(封墳)이 세 개인 것이라고 한다.


팔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이 전사하자 처음 유해를 모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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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는 주군(主君)을 위해 대신(代身) 관복(官服)을 바꿔 입고 목숨을 바친 사람이 역사상(歷史上) 여러 () 나타난다.
신라시대(新羅時代)김춘추(金春秋) 역시 고구려(高句麗)청병(請兵)하러 갔다가, 고구려왕(高句麗王)에게 붙잡히는 신세(身世)가 되자, 고구려(高句麗) 신하(臣下) 선도해(先道解)의 ‘귀토지설(龜兎之說)’ 이야기를 듣고 탈출(脫出)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途中)고구려(高句麗) 순라군(巡邏軍)에 들켜 위기일발(危機一髮)순간(瞬間)이었다.
이때 온군해(溫君解)춘추(春秋)와 옷을 바꿔 입고, 그를 탈출(脫出)시켰다.
이것을 우리는 기신(紀信)계책(計策)-한고조(漢高祖)가 하남성 영양에서 항우(項羽)군사(軍士)에게 포위(包圍)되었을 때, 기신(紀信)고조(高祖)의 수례를 타고 초군(楚軍)을 속여, 마침내 고조(高祖)를 대신하여 죽었다.
이를 두고 한 말이다-이라고 한다.
자신(自身)이 모시는 주군(主君)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아름다운 충절(忠節)항상(恒常) 오랫동안 인구(人口)회자(膾炙)되곤 한다.
박제상(朴堤上)도 조금은 다른 방법(方法)이었지만 ()의 동생을 왜국(倭國)에서 탈출(脫出)시키고 죽었다.
한 번 죽음으로서 영원(永遠)히 사는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묘사 내의 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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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睿宗)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는 향가(鄕歌)라는 천년(千年)신라(新羅)의 노래가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시점(時點)이었다.
학자(學者)들은 이를 쇠잔기(衰殘期) 향가(鄕歌)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냥 고려가요(高麗歌謠)라고 하기도 한다.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던 향가(鄕歌)명맥(命脈)고려(高麗) 중기(中期)까지도 생명력(生命力)유지(維持)하였다는 것은 여러모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이어 나타나는 문학(文學) 갈래인 시조(時調)에 일정 부분(部分) 영향(影響)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시조(時調)는 지금도 창작(創作)되고, 읊어 지는 문학(文學)이므로 향가(鄕歌)잔영(殘影)이 아직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지묘사 내의 표충사(신숭겸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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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봄도 또 이렇게 한 페이지 달력마냥 지나가는가 보다.
마음은 향가(鄕歌)의 발자취를 찾아 바삐 움직이지만, 아직까지도 향가(鄕歌) 유적(遺蹟) 찾기는 꼼짝을 하지 않는다.
요즘 그 흔한 1인 시위(示威)라도 해야 할까? 가슴이 아직도 답답함을 넘어서 고통(苦痛)에 가까워져 온다.
그래도 기다리자, 기다림이 또 다른 다가서기라고 하지 않던가.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영정(지묘사 관리인에게 어렵게 허락을 얻어 촬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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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한자
1.招待  2.銀杏  3.忠節  4.將軍  5.自身  6.追慕  7.鄕歌  8.高麗  9.參席  10.左右  11.臣下  12.經緯  13.說明  14.卽時  15.包圍  16.體軀  17.御駕  18.戰死  19.冥福  20.葬禮  21.盜掘  22.草芥  23.苦心  24.封墳  25.主君  26.代身  27.請兵  28.身世  29.脫出  30.途中  31.危機一髮  32.春秋  33.計策  34.高祖  35.恒常  36.人口  37.膾炙  38.方法  39.新羅  40.學者  41.命脈  42.維持  43.文學  44.部分  45.影響  46.創作  47.遺蹟  48.示威  49.苦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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